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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의 일급정보: 65년 외길 인생 수제 옹기 옹기장 명장 배영화씨

👉생활정보도우미👈 2024. 5. 30.


신토불이(身土不二). 몸과 흙은 둘이 아니다. 지난 65년간 옹기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왔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기술을 배우기 위해 시작했지만, 지금은 옹기마을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배영화 옹기명장의 인생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대가의 일급정보: 65년 외길 인생, 수제 옹기 대가

영화요업

  • 주소: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외고산3길 45
  • 65년 한 우물…전 세계에 외고산 옹기 알리다
  • "문화 담은 옹기 후세에 올바르게 전파"

 

 

옹기마을 최고령자, '신토불이'로 거듭나다

영덕에서 태어난 배영화(82)씨는 어릴 적 전쟁과 가난이라는 보릿고개를 겪었습니다. 그는 가난 속에서 벗어나고자 손기술을 배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958년, 배씨가 17세였을 당시 교회에서 만난 옹기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배씨는 옹기마을에서 옹기장인의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쉽지 않았습니다. 힘이 많이 들어가는 옹기장의 특성상 매일매일 고단한 하루를 버티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힘들 때가 가마에 불을 붙일 때인데, 7일 동안 불을 지켜야 했다"라며 옹기에 낮 밤을 지새우기도 한 날들을 회상했습니다.

 

 

힘들게 탄생한 작품이 무시당하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는 "돈이 없는 옹기장들은 '사기'그릇을 들고 밥값을 대신해 내기도 했다"며 "'사기당했다'라는 말이 옹기장들한테 하는 말이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의 인식이 안 좋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옹기쟁이'라는 이명 때문에 국내에서 옹기업 종사자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1998년 도예연수원 초빙으로 일본에 넘어갔을 때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일본에서 옹기장인으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을 때 그곳에서 도자기는 단순 그릇이 아닌 예술작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배씨는 국내에도 옹기를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돈 벌이로 시작한 옹기업이지만 일본을 다녀온 이후 옹기를 단순 그릇이 아닌 한국의 역사를 표현하는 문화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로써 1998년 영화요업이 탄생했습니다. 옹기만 바라보고 달려온 결과 배씨는 흙과는 떨어질 수 없는 외고산 옹기마을의 '신토불이'가 되었습니다. 현재는 7명밖에 남지 않은 외고산 옹기마을의 최고령 옹기명장이기도 합니다.

옹기에 문화를 담다

배씨의 위상은 세계적으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가 1998년 영화요업을 설립한 이후 옹기를 예술작품 개념보다는 어떻게 쓰이느냐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일상 속에 그릇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의 전문성에 해외에서도 옹기를 구매하러 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기회 삼아 지난 2000년대 예루살렘에서 옹기 제작 전시를 진행해 이스라엘 한국 대사로부터 감사장을 수여받았습니다. 또한 지난 2007년에는 일본 '다케시오 도기협회'와 '외고산 옹기협회'가 교류 협력 체결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외고산 옹기는 울산을 너머 전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신토불이'를 알렸습니다.

그는 "외고산 옹기가 해외에서도 찾는 상품이 된 것에 일조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라고 전했습니다.

이 같은 성과를 인정받아 그는 지난 2008년 울산시 '조형예술분야 시민예술상'을 받았고, 2009년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등록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2016년 울산 명장회 옹기명장으로 우뚝 섰습니다.

현재 그의 목표는 문화를 담은 옹기를 후세에 올바르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배씨는 "지역마다 문화를 담고 있는 기술, 도구, 과정이 조금씩 다르다"라며 "울산 옹기를 포함해 지역 도예 특색을 배우고 기록하고자 교본을 정리해 후세에 전달하고 싶다"라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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